글로벌 공급망 재편과 기술 패권 경쟁이 격화되며 경제 안보가 국가 생존의 핵심 변수로 부상했다. 스톡홀름국제평화연구소(SIPRI)의 최신 보고서에 따르면 2023년 세계 군사비 지출은 2조 4430억 달러에 달했으나, 이 예산이 반도체, 희토류 등 핵심 전략자산 방호에는 극히 미미하게 투입되는 구조적 모순이 심화되고 있다. 이는 전면전 발발 시 첨단 무기체계의 지속가능성을 담보할 수 없는 치명적 약점이다.
![]()
전장(戰場)이 된 글로벌 공급망
과거의 전쟁이 영토와 자원을 두고 물리적 충돌을 벌이는 양상이었다면, 현대전의 패러다임은 공급망의 ‘초크포인트(Choke Point)’를 장악하는 것으로 전환되었다. 특정 국가가 독점하는 핵심 소재나 부품 공급을 차단하는 것만으로도 적국의 국방 산업 전체를 마비시킬 수 있다. 이는 직접적인 화력 투사 없이도 전쟁 승패를 결정짓는 새로운 전술 교리이다.
국방력은 더 이상 재래식 무기의 수량만으로 측정되지 않는다. 첨단 무기체계를 생산하고 유지하는 산업 생태계의 복원력(Resilience)이 군사력의 핵심 척도가 되었다. 적의 물리적 타격보다 공급망 교란이 더 큰 위협으로 작용하는 경제 안보 전쟁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실리콘 방패’의 균열과 반도체 패권
대만의 반도체 산업을 일컫는 ‘실리콘 방패(Silicon Shield)’는 대만을 지키는 전략적 자산인 동시에 가장 치명적인 아킬레스건이다. 중국의 대만 봉쇄 시나리오가 현실화될 경우, 전 세계 첨단 무기 생산은 즉각 멈춰선다. F-35 스텔스 전투기부터 이지스함의 레이더 시스템까지, 모든 현대 무기체계는 대만산 고성능 반도체에 절대적으로 의존한다. 미국이 ‘반도체 과학법(CHIPS Act)’을 통해 자국 내 생산시설을 확충하는 것은 단순한 산업 정책이 아닌, 국방 공급망의 생존을 건 전략적 투자이다. 국제전략문제연구소(IISS)는 ‘밀리터리 밸런스 2024’ 보고서에서 반도체 공급망의 취약성을 21세기 국방의 최대 리스크로 지목하였다.
희토류, 보이지 않는 비대칭 전력

중국이 장악한 희토류(Rare Earth Elements) 시장은 현대 국방 과학의 급소를 쥐고 있다. 정밀유도미사일(PGM)의 유도장치, 레이더 시스템, 전자전 장비 등 첨단 국방 기술의 핵심 소재가 바로 희토류이다. 중국은 전 세계 희토류 생산의 70% 이상을 차지하며 이를 전략적 무기로 활용할 가능성을 공공연히 내비친다. 서방 방산 업체들이 중국산 희토류에 의존하는 현 구조는 유사시 심각한 생산 차질로 이어진다. 이는 값비싼 항공모함이나 전투기 없이도 상대의 첨단 전력을 무력화할 수 있는 강력한 비대칭 전력으로 기능하며, 대한민국 국방부 역시 국방백서를 통해 핵심 광물 확보의 중요성을 수차례 강조한 바 있다.
에너지·식량 안보, 국가 저항의지(Will to Fight)의 근간
에너지와 식량은 전쟁 수행 능력을 뒷받침하는 가장 기본적인 요소이다. 이 두 가지 자원의 공급망이 무너지면 국가는 내부로부터 붕괴한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러시아가 천연가스를 무기화하여 유럽의 정치적 결정을 흔들려 했던 시도에서 에너지 안보의 중요성을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식량 자급률이 낮은 국가는 장기전 수행 능력이 현저히 떨어진다. 해상 보급로 차단과 같은 봉쇄 전략에 직면할 경우, 군수물자 이전에 식량 부족으로 인한 사회적 혼란이 먼저 발생하며 국가의 총력전 수행 의지를 꺾어버린다. 따라서 안정적인 에너지원 확보와 식량 공급망 다변화는 군사력 증강과 동일한 수준의 국방 과제로 인식되어야 한다.
세력 균형의 재편과 새로운 지정학
경제 안보의 중요성이 부각되면서 전통적인 군사 동맹의 지정학적 가치 역시 재평가받고 있다. 이제 동맹은 군사적 상호방위를 넘어, 핵심 기술과 자원의 공급망을 공유하고 보호하는 ‘기술-안보 동맹’으로 진화하고 있다. 반도체 동맹(Chip 4), 핵심광물안보파트너십(MSP) 등은 이러한 흐름을 명확히 보여준다.
향후 국제 질서는 군사력뿐만 아니라 반도체, 배터리, 핵심 광물 등 전략적 자산을 얼마나 안정적으로 확보하고 통제하는지에 따라 세력 균형(Balance of Power)이 결정될 것이다. 이 새로운 전쟁의 규칙을 이해하고 선제적으로 투자하지 않는 국가는 미래의 지정학적 경쟁에서 종속적인 위치로 전락할 수밖에 없는 냉엄한 현실에 직면해 있다.
자주 묻는 질문
Q1. 전통적 무기체계 예산이 경제 안보 분야로 실제 이전되고 있는가?
예산의 전면적 재편보다는 국방 R&D 예산 내에서 비중이 조정되는 추세이다. SIPRI 데이터에 따르면 주요 군사 강국들의 국방 예산 중 AI, 반도체, 사이버 등 신기술 분야 투자 비중이 매년 유의미하게 증가하고 있다. 이는 재래식 무기 감축이 아닌, 첨단 기술력 확보를 통한 질적 우위 추구로 해석된다.
Q2. 한국과 같은 중견국이 강대국의 공급망 압박에 어떻게 대응할 수 있는가?
단독 대응은 불가능하며, 가치 공유 국가와의 연대를 통한 ‘프렌드쇼어링(Friend-Shoring)’이 유일한 해법이다. 특정 국가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고, 기술 동맹을 통해 공급망을 다변화하며, 국내에서는 소부장(소재·부품·장비) 기술 자립도를 높이는 투트랙 전략이 필수적이다.
Q3. 식량 안보 투자가 실질적인 전쟁 억제력으로 작용할 수 있는가?
직접적인 억제력은 아니지만, 국가의 ‘전쟁 지속 능력’과 ‘회복탄력성’을 높여 적의 침공 의지를 약화시키는 간접적 억제 효과를 가진다. 장기전이나 봉쇄 상황을 견딜 수 있다는 능력 자체가 상대방의 전쟁 비용 계산을 복잡하게 만드는 전략적 요소로 작용한다.
Q4. 민간 빅테크 기업을 국방 자산으로 간주해야 하는가?
그렇다. 현대전에서 AI, 클라우드, 우주항공 기술을 보유한 민간 기업은 사실상 국방 산업의 일부이다. 이들 기업의 기술력과 데이터는 전장 상황 인식, 지휘통제, 정밀 타격 능력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이들 기업에 대한 적대적 M&A나 기술 유출은 국가 안보에 대한 직접적 위협으로 간주해야 한다.
Q5. 가장 간과하기 쉬운 경제 안보 위협 요인은 무엇인가?
해저 광케이블(Subsea Data Cables)이다. 전 세계 인터넷 트래픽의 99%를 담당하는 이 기반시설이 물리적 혹은 사이버 공격으로 파괴될 경우, 해당 국가의 금융, 통신, 군 지휘통제 시스템은 즉각 마비된다. 이는 핵무기 사용 없이도 사회 전체를 무력화할 수 있는 비대칭적이고 심각한 위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