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아침 마당을 나서면 은은한 풀 냄새가 납니다. 도시에서는 맡을 수 없었던, 젖은 흙과 풀이 섞인 그 냄새. 지금 저는 대도시는 아니고 조금 외진 시골 동네에 살고 있는데요. 출퇴근 길이 멀긴 해도 은퇴 후엔 더 느리게, 더 나답게 살아보겠다고 마음먹고 이사 온 지 어느덧 시간이 꽤 흐른 것 같네요.
오늘은 병으로 도시를 떠나 고향 포천으로 돌아온 한 사람이, 농사와 사람과 실수를 통과하며 끝내 자기 삶의 자리로 걸어 들어가는 이야기를 담은 책, <아파서 시골에 왔습니다> 리뷰입니다. 전직 기자의 유쾌 발랄한 농부 도전기이면서도, 읽다 보면 결국 n 분의 1이던 사람이 온전한 하나가 되어가는 이야기처럼 느껴졌어요. 그 마음을 메인으로 소박하게 한 상 차려보려 합니다.
상을 차리게 된 이유
시골에 살다 보면 문득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나는 지금 정말 이 삶 속으로 들어와 살고 있는 걸까, 아니면 아직도 언젠가를 준비하며 가장자리만 맴도는 걸까 하는 생각 말이죠. 저도 한적한 삶을 좋아하고, 은퇴 후에는 조금 더 느리게 살아보고 싶다는 마음을 오래 품고 있었지만, 막상 현실은 도시로 오가며 시간을 쪼개 사는 날이 더 많았습니다.
그러다 이 책을 만나게 되었는데요. 저자는 귀촌을 낭만이나 계획으로 시작한 사람이 아니라, 병으로 인해 삶의 방향이 갑자기 바뀐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중증 근무력증이라는 병을 진단받고 도시 생활을 접은 뒤 고향 포천으로 돌아왔고, 그곳에서 농부로 살아가게 되죠. 선택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시작된 귀촌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 궁금해서 책을 펼쳤습니다.
이 상의 특별함
요즘 인스타를 보면 다 쓰러져가는 시골집을 근사하게 리모델링해서 예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자주 보입니다. 그에 반해 이 책이 좋았던 건 시골살이를 예쁘게 포장하지 않는다는 점이었어요.
트랙터를 몰다 논바닥에서 애를 먹고, 볍씨를 망치고, 무 써는 기계를 떨어뜨리고, 사소한 실수와 우스운 실패를 반복하는데도 그 장면들이 이상하게 가볍지 않습니다. 웃기긴 웃긴데, 그 밑에 자기 삶을 끝까지 붙들고 버텨낸 시간이 같이 깔려 있어 더 흥미로웠어요.
반응 한 스푼
| 교보문고 | ★ 10.0 | 리뷰 (21) |
| 예스24 | ★ 9.6 | 리뷰 (33) |
| 알라딘 | ★ 9.7 | 리뷰 (21) |
논에 던져진 우렁이처럼
저자는 자신을 논에 던져진 우렁이에 비유합니다. 라디오 PD를 꿈꾸고, 영화 기자와 북 관련 일을 하며 도시에서 살아온 사람이 어느 날 병으로 인해 고향으로 돌아와 농사를 시작하게 된 것이니까요. 본인도 왜 여기 와 있는지, 여기서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하는지 알 수 없던 시간이 먼저 있었던 셈입니다.
그래서 초반의 농부 생활은 적응기라기보다 당황의 연속에 가깝습니다. 트랙터를 몰다 논둑을 망치고, 쟁기로 애를 먹고, 논에서 하루 종일 우왕좌왕하는데도 이상하게 읽는 사람을 지치게 하지 않습니다. 잘 못하는 자기 모습을 감추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망가지면 다시 고치면 되니까”라는 태도에 닿는데, 저는 이 장면이 참 좋았습니다. 삶을 잘 살아내는 사람의 모습이라기보다, 망가짐을 견디는 법을 조금씩 배워가는 사람의 모습 같아서 말이죠.
귀촌 일기 아래에 있던 더 깊은 질문
이 책은 귀농 에세이처럼 시작되지만, 읽다 보면 조금 다른 곳까지 갑니다. 농사와 시골 이야기를 하다가도 어느 순간 저자의 20대와 마음의 결핍, 사람들 사이에서 좋은 사람으로 살려 했던 시간들이 불쑥 올라옵니다. 특히 저자가 자신의 젊은 날을 돌아보며 꺼내는 단어가 “허기”였다는 점이 오래 남았습니다.
배가 고픈 게 아니라 마음이 고팠다는 말. 모범생이었고, 좋은 사람이라는 평가도 많이 받았지만 정작 ‘안효원으로 사는 일’은 놓치고 있었다는 고백이 이 책을 더 깊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이 책은 단순히 시골살이의 고단함이나 귀촌 적응기가 아니라, 한 사람이 자기 자신에게 어떻게 도착하는지를 보여주는 기록처럼 느껴졌습니다.
망할 용기
책의 마지막까지 읽고 나서 남는 표현은 “망할 용기”였습니다. 얼핏 들으면 센 말 같지만, 이 책에서는 오히려 자기 삶을 다시 시작하게 만드는 말처럼 읽힙니다. 손에 쥔 게 아무것도 없던 아버지는 망할 기회가 없었고, 손에 하나쯤 쥔 자신은 오히려 망할 용기가 없었다는 대목도 인상적이었어요.
15년 동안 논바닥에서 구르고, 실수하고, 사람에게 상처받고, 또 자기 안의 허기를 들여다본 끝에 저자는 조금씩 달라집니다. 밤나무 북스테이 같은 다음 장면도 그래서 단순한 사업 구상처럼 보이지 않았어요. 더는 남이 정한 좋은 사람의 틀 안에만 머무르지 않고, 자기 식으로 살아보겠다는 결심의 형태처럼 보였습니다.
제목은 귀촌 에세이지만, 끝까지 읽고 나면 결국 이 책은 자기 삶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는 이야기였습니다.
내 삶에 덜어두기
책을 덮으면서 제 생활을 조금 돌아보게 됐습니다. 시골을 좋아한다고 말하면서도 정작 지금의 생활은 임시라고 생각하고, 언젠가 더 잘 준비되면 시작하겠다고 미루고 있었던 건 아닐까 싶더라고요. 그런데 저자는 그런 준비보다 실패를 견디는 쪽에 더 가까이 서 있었습니다.
실수한 날 자신을 그냥 토닥인다는 문장도 좋았습니다. 망가뜨렸으면 고치면 되고, 일 한 시간 더 하면 되고, 고친 논둑은 오히려 더 단단해질 수 있다는 식의 태도 말입니다.
요즘 제게도 필요한 건 완벽하게 준비해서 시작하는 것보다, 조금 망해도 계속 가는 마음 아닐까 싶었습니다. 망할 용기는 나중에 갖는 게 아니라, 지금의 삶 안에서 조금씩 내는 것인지도 모르겠네요.
곁들여 낸 대화 한 접시
“여보, 이 책 재밌더라. 좀 웃기면서도 이상하게 가볍지가 않아.”
“귀농 이야기라며?”
“응. 근데 읽다 보면 그보다 자기 삶 찾아가는 이야기 같아.”
“어떤 점이 남았어?”
“’망할 용기’라는 말. 실패한 얘기를 자꾸 숨기지 않는 거.”
“그게 왜 좋았는데?”
“잘 살아야 한다는 말보다, 좀 망해도 다시 가면 된다는 말이 남더라고. 자기도 읽어봐”
“위로가 되긴 하네.”
“맞아. 그냥 시골 이야기인 줄 알았는데 결국은 사람 이야기.”
한 상 정리
<아파서 시골에 왔습니다>는 처음엔 유쾌하게 읽힙니다. 농사일의 시행착오도 많고, 시골에서 만나는 사람과 동물 이야기들도 재밌고, 문장 곳곳에 웃음이 배어 있습니다. 그런데 끝까지 읽고 나면 이상하게 마음 한가운데 묵직한 것이 남습니다.
병으로 인해 떠밀리듯 시작된 귀촌은 시간이 지나며 한 사람이 자기 삶을 받아들이는 과정으로 바뀌죠. 그 과정에서 저자는 실패를 감추지 않고, 허기를 외면하지 않고, 망할 용기라는 말까지 꺼내 듭니다. 그래서 이 책은 시골살이를 권하는 책도, 말리는 책도 아니었습니다. 다만 어디에 살든 결국 자기 삶을 자기 것으로 살아내야 한다는 사실을 조용히 보여주는 책에 더 가까웠어요.
인구가 줄어드는 시골의 현실, 사람 귀한 곳에서 비로소 귀한 사람이 되어가는 과정, 아버지와 나란히 일하는 시간, 그리고 끝내 자기 방식의 다음 장을 열어보려는 마음까지. <아파서 시골에 왔습니다>는 귀농 귀촌 에세이의 옷을 입고 있지만, 실은 어떻게 나답게 살아갈 것인가를 이야기하는 책 같았습니다.